얼마 전 한 대표님이 노트북을 돌려 보여 주시며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거 AI한테 시켰는데 십 분 만에 뽑아 줬어요. 카피라이터한테 맡길 때보다 훨씬 빠르네요.” 화면에는 매끄러운 영문 카피가 다섯 가지 버전으로 줄지어 있었습니다. 문장은 깔끔했고 문법은 흠잡을 데 없었습니다.
저는 잠시 그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여쭤봤습니다. “이 중에 어떤 걸 쓰실 건가요?” 대표님은 잠깐 머뭇거리시더니 답하셨습니다. “음, 그건 좀 더 봐야겠는데요.” 바로 그 자리에 마케터의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AI는 작가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한동안 카피라이팅은 단어를 빚는 일이었습니다. 헤드라인 한 줄을 두고 며칠을 끙끙대고, 동사 하나를 바꿔서 분위기를 살리는 그런 일이요. 좋은 카피라이터는 그 미세한 차이를 아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비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일을 AI가 정말 잘합니다. 다섯 가지 버전, 열 가지 톤, 격식 있는 어조와 친근한 어조까지 몇 초 만에 뽑아냅니다. 솔직히 평균 이상의 카피라이터가 한 시간 걸려 쓰는 결과보다 더 매끄러울 때도 많습니다. 처음 그걸 마주했을 때 저도 잠시 멍해졌습니다. 이제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은 어떻게 되는 건가, 마케팅 부서는 줄어드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일을 하면 할수록 다른 결론에 닿았습니다. AI가 잘하는 건 “쓰는 일”이지, “정하는 일”이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마케터의 본업은 사실 후자였습니다.
글을 잘 쓴다고 글이 좋아지는 건 아닙니다
한번은 클라이언트께서 AI로 뽑은 카피 스무 가지를 들고 오신 적이 있습니다. 다 그럴듯했습니다. 그런데 그중 어느 것도 그 브랜드의 자리에 정확히 맞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건 너무 똑똑한 척했고, 어떤 건 너무 친근했고, 어떤 건 경쟁사가 똑같이 써도 이상하지 않을 말이었습니다.
문제는 글 솜씨가 아니었습니다. AI는 그 브랜드가 “누구에게”, “어떤 순간에”, “어떤 약속을 하려는지”를 모르고 썼던 겁니다. 모르고 쓴 좋은 글은 결국 누구의 것도 아닌 글이 됩니다. 매끄럽지만 무게가 없는 문장 말이죠.
그래서 저는 그 자리에서 카피를 새로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질문을 다시 정리했습니다. 이 제품의 진짜 소비자는 누구인가, 그 사람의 어떤 불안을 건드려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약속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 그 답이 정해지자 스무 가지 중 살릴 만한 한 줄이 보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AI가 이미 써 놓은 더미 안에서 “골라낼” 수 있게 됐습니다.
마케터는 이제 편집장입니다
저는 요즘 마케터의 일을 작가의 자리에서 편집장의 자리로 옮겨가는 일이라고 설명하곤 합니다. 편집장은 직접 글을 쓰지 않습니다. 대신 이 잡지가 누구를 위한 잡지인지, 이번 호의 메시지는 무엇인지, 어떤 글을 싣고 어떤 글을 빼야 하는지를 정합니다. 잡지의 품질을 결정하는 건 결국 그 판단들의 합입니다.
AI가 카피를 쓰는 시대의 마케터도 비슷합니다. 무엇을 말할지, 누구에게 말할지, 어떤 톤으로 말할지, 어디까지 약속할지를 정해 줘야 AI가 비로소 쓸모 있는 도구가 됩니다. 그 방향이 흐릿하면 AI는 매끄러운 문장을 무한히 토해 내고, 우리는 그 더미 앞에서 도리어 길을 잃습니다.
실제로 저는 AI 도입 후 카피의 양은 늘었는데 일은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고 토로하시는 마케터분들을 자주 만납니다. 쓰는 시간은 줄었는데, “이게 정말 우리 브랜드의 목소리인가”를 판단하는 시간은 늘었다는 겁니다. 그 시간이 사실 가장 중요한 시간이고요.
사라지지 않는 것은 결국 사람의 판단입니다
AI가 점점 더 잘해질수록 역설적으로 마케터의 역할은 더 무거워집니다. 누구나 매끄러운 글을 만들 수 있는 시대에는 매끄러움 자체가 차별점이 되지 못합니다. 그 글이 정확한 사람의 정확한 순간을 겨냥했는지, 브랜드가 시간을 들여 쌓아 온 약속과 어긋나지 않는지, 같은 카테고리의 다른 누구도 못할 말을 하고 있는지가 진짜 승부처가 됩니다.
이건 AI가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시장을 직접 읽고, 소비자와 대화하고, 브랜드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는 사람만 답할 수 있는 영역이거든요. 그러니 AI를 두려워하기보다는, 우리가 그 자리에 앉아 무엇을 묻고 무엇을 결정할지를 더 진지하게 고민하는 편이 낫습니다.
좋은 카피는 결국 좋은 질문에서 나옵니다. AI는 답을 잘 만듭니다. 질문을 던지는 일은 여전히, 그리고 점점 더 사람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