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 크라프트지로 감싼 작은 노트 한 권이 있습니다. 표지에는 아무 그림도, 그럴듯한 로고도 없습니다. 가격표에 적힌 숫자는 무난한 수준이고, 어디에도 브랜드 이름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미국의 디자인 학교 학생들, 뉴욕의 작은 사무실, 캘리포니아의 미니멀리스트 블로거들 사이에서 이 노트는 일종의 작은 표식 같은 물건이었습니다. “나는 브랜드를 사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결국 같은 브랜드에서 노트와 펜과 수납함을 함께 골라 담는 묘한 풍경. 그 한가운데에 일본의 무인양품(Muji)이 있었습니다.
로고를 지운다는 첫 결정
무인양품(Muji)은 1980년 일본에서 출발했습니다. 운영사는 료힌 케이카쿠(Ryohin Keikaku)고, 처음에는 한 슈퍼마켓 체인의 자체 브랜드 같은 자리였습니다. 이름부터 ‘무인양품(無印良品)’, 곧 ‘브랜드 없는 좋은 물건’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로고를 키우는 대신 로고를 지우고, 화려한 광고 대신 정직한 가격과 단정한 디자인을 전면에 세우겠다는 결정. 이 한 줄짜리 선언이 이후 사십여 년 브랜드의 모든 결정을 일관되게 묶어 줍니다. 글로벌 기준으로 7,000여 가지에 이르는 상품을 다루지만, 어떤 카테고리를 펼쳐 봐도 시각적 인상이 비슷합니다. 무채색, 절제된 형태, 최소한의 글자. 료힌 케이카쿠의 2024 회계연도 글로벌 매출은 약 6,616억 엔, 미국 달러로 44억 달러 규모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에 들어서며 내린 두 번째 결정
미국에 발을 들이면서 무인양품(Muji)이 내린 핵심적인 결정은 매장의 크기와 자리였습니다. 일본에서처럼 큰 플래그십을 통해 라이프스타일 전체를 한 자리에서 보여 주는 방식을,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같은 도심 일급 상권에 그대로 옮겨 심었습니다. 매장 문을 열면 노트와 옷, 수납함, 디퓨저, 가구가 한 결로 흐르듯 펼쳐졌고, 매장 자체가 가장 큰 광고가 되도록 설계됐습니다. 디자인을 좋아하는 도시 소비자에게는 강한 충성이 생겼습니다.
다만 이 결정에는 무거운 가격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디코드 재팬(Decode Japan) 같은 분석은 미국 매장이 임대료가 매우 높은 자리에 들어섰다는 점을 같은 비중으로 지적합니다. 큰 평수와 비싼 임대료를 떠받치려면 평당 매출이 따라와야 하는데, 미국 일반 소비자에게 무인양품(Muji)은 여전히 ‘아는 사람만 알아보는 일본 브랜드’에 가까웠습니다. 인지도가 매장 크기를 끝내 따라잡지 못하는 구조였습니다.
2020년, 멈춰 선 자리에서 다시 그린 그림
균열이 표면 위로 올라온 시점은 2020년이었습니다. 무인양품(Muji)의 미국 법인은 2020년 7월 10일 미국 델라웨어 법원에 챕터 11 파산보호를 신청했습니다. 코로나19가 결정타였지만, 보도와 사례 분석은 그 전부터 누적된 문제를 함께 가리킵니다. 비싼 임대료, 수입과 물류에 얹히는 비용, 일본 본사 기준으로 짠 상품 구성이 미국 소비자의 일상 패턴과 잘 맞지 않았다는 평가입니다.
이 시기 회사가 내린 또 하나의 결정은 매장을 줄이고 운영 구조를 다시 짜는 일이었습니다. 일부 미국 매장이 문을 닫았고, 남은 매장은 더 신중한 자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거대한 플래그십 한 곳에 모든 것을 거는 방식에서, 채널을 여러 갈래로 나누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졌습니다.
매장 밖에서 다시 시작된 대화
흥미로운 건 그다음 장면입니다. 무인양품(Muji)이 미국에서 비교적 조용히 다시 시도한 곳은 매장 너머의 채널이었습니다. 자체 온라인 스토어와 무지 패스포트(MUJI passport) 앱을 키워, 이 앱은 글로벌 기준 약 7,853만 회 내려받기를 기록한 디지털 자산으로 자랐습니다. 마케팅 솔루션 어텐티브(Attentive)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캐나다 이커머스 책임자는 이메일과 회원지에 익숙한 일본 본사와 달리, 북미에서는 문자(SMS)가 마케팅 믹스의 큰 축이 됐다고 밝혔습니다. 같은 브랜드라도 시장에 따라 말 거는 도구를 바꾼 셈입니다.
아마존(Amazon) 같은 마켓플레이스에서 무인양품(Muji) 제품을 볼 수 있게 된 흐름도 비슷한 결입니다. 어떤 채널이 핵심이라고 회사가 공식적으로 못 박지는 않았지만, 큰 매장 하나에 모든 것을 걸던 시절과 비교하면 풍경이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매장은 브랜드를 직접 ‘경험’하게 하는 자리로 좁히고, 일상적인 구매와 재구매는 디지털과 마켓플레이스에서 일어나도록 설계된 모양새입니다.
그래서 우리 브랜드는?
무인양품(Muji)의 미국 이야기를 한국 브랜드의 시선으로 다시 읽어 보면, 몇 가지가 또렷이 남습니다. 첫째, 본국에서 통한 매장 모델을 그대로 들고 가는 일은 생각보다 위험합니다. 일본에서 효율적이었던 큰 플래그십이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의 임대료 위에 그대로 올려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가 분명한 증거입니다. 미국 시장의 임대료와 물류비, 그리고 현지 인지도 수준은 매장의 크기와 자리를 처음부터 다시 계산하게 만듭니다.
둘째, ‘브랜드 철학’은 강력하지만 그것만으로 매출이 따라오지는 않습니다. 로고를 지운 미니멀리즘은 디자인을 사랑하는 소수에게 깊은 충성을 만들지만, 그 충성을 매출로 옮기려면 가격, 채널, 인지도 확장이 같은 속도로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셋째, 미국에서는 채널을 분산하는 결정을 빨리 내리는 편이 안전합니다. 매장 한 종류로만 승부하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고, 자체 사이트와 앱, SMS, 마켓플레이스가 만드는 여러 갈래의 작은 매출이 결국 브랜드를 지탱합니다.
로고를 지우는 일은 멋있지만, 시장에서는 지운 만큼의 인지도를 다른 자리에서 채워 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무인양품(Muji)이 미국에서 치른 값비싼 수업의 핵심은, 어쩌면 그 한 줄일지 모릅니다.
참고 자료
- Attentive: Inside MUJI’s E-Commerce Strategy
- Decode Japan: How MUJI US expansion and stores failed
- Globis Insights: The MUJI W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