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가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선수들의 유니폼 어깨에 낯선 글자가 붙었습니다. 미국 스포츠 팬에게는 발음조차 익숙하지 않은 이름, 비비고(Bibigo)였습니다. 같은 시기 PGA 투어 대회장에도 같은 이름이 걸려 있었습니다. 한국의 식품 회사가 왜 농구 유니폼과 골프 대회에 이름을 새기는지, 처음에는 의아하게 보였을 겁니다. 그런데 그 노출은 결국 한 곳으로 흘러갔습니다. 미국 마트의 냉동식품 코너, 그중에서도 만두 매대였습니다.
CJ제일제당이 미국에서 밀고 있던 것은 한식 전반이 아니었습니다. 딱 하나, 냉동만두였습니다. CJ는 공식 자료에서 비비고 만두를 ‘히어로 제품’이라고 부릅니다. 라면도 김치도 소스도 있었지만,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여는 열쇠는 만두 하나로 정했습니다. 이 글은 그 하나의 선택이 어떻게 브랜딩, 유통, 생산, 마케팅까지 전부를 규정했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덤플링이 아니라 만두라고 부른 이유
미국 냉동식품 매대에는 이미 ‘덤플링’이라는 단어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중국식 만두를 뜻하는 그 단어를 그대로 쓰면 소비자가 쉽게 이해했을 겁니다. 하지만 비비고는 굳이 ‘만두(mandu)’라는 낯선 한국어를 포장 앞면에 올렸습니다. 이해받기 쉬운 길을 스스로 포기한 셈입니다.
이 선택에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덤플링이라고 부르는 순간 비비고는 기존 중국 브랜드와 같은 선반, 같은 기준 위에서 비교당합니다. 반면 만두라고 부르면 “이건 다른 물건”이라는 신호가 됩니다. 실제로 제품도 달랐습니다. 만두피가 얇고, 채소 비중이 높고, 고기는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두꺼운 피에 고기가 꽉 찬 기존 덤플링과 나란히 놓았을 때, 이 차이는 그대로 ‘가볍고 건강한 선택’이라는 인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웰니스를 따지는 미국 소비자에게 꽤 잘 맞는 옷이었습니다.
이름을 지켰다고 해서 맛까지 고집한 것은 아닙니다. 비비고는 미국인 입맛에 맞춘 조합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부추 대신 고수를 쓴 치킨 만두입니다. 단백질 위주 식단을 챙기는 미국 소비자 성향과도 맞아떨어져 현지에서 가장 사랑받는 품목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채식 수요를 겨냥한 식물성 만두도 뒤따랐습니다. 이름은 한국어로 남기고, 속은 현지에 맞춘 것입니다.
2조 원을 주고 산 것은 회사가 아니라 냉동고였다
브랜딩이 아무리 또렷해도, 소비자가 물건을 만날 수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초기 비비고의 미국 유통은 사실상 코스트코에 묶여 있었습니다. 한 채널에서 통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다음 단계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2019년 CJ제일제당은 미국 냉동식품 업계 2위 기업인 슈완스(Schwan’s)를 약 2조 원에 인수합니다. 식품 회사가 다른 식품 회사를 산 사건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확보한 것은 유통망과 생산 기반이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인수로 비비고 만두가 닿을 수 있는 미국 유통 거점은 약 6만 곳 규모로 늘어났습니다. 이후 월마트, 크로거, 타깃 같은 대형 체인은 물론 푸드시티, 하이비 같은 지역 강자와 중소형 슈퍼마켓까지 진열대가 열렸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CJ는 미국 안에 만두 생산 거점 여덟 곳을 운영한다고 밝혔습니다. 서부, 중서부, 남부, 동부에 나눠 두고 전국에 공급하는 구조입니다. 냉동식품은 무겁고 부피가 크고 저온을 유지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배로 실어 나르는 방식으로는 이 게임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만두 하나에 집중했기 때문에, 그 하나를 위해 미국 안에 공장을 여덟 개 두는 판단이 오히려 명료해졌습니다.
스포츠와 K팝, 그리고 만두가 만난 자리
유통이 열렸다고 사람들이 알아서 집어 드는 것은 아닙니다. 냉동만두는 원래 소비자가 브랜드를 따져 가며 사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비비고는 이름 자체를 익숙하게 만드는 일에 나섰습니다.
레이커스 스폰서십과 PGA 투어 더CJ컵이 그 무대였습니다. CJ는 이 스포츠 파트너십의 목적이 미국 내 브랜드 인지도 강화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사례 연구를 다룬 코리아타임스 보도는 여기에 K팝 페스티벌 케이콘(KCON)까지 더해, 비비고가 이런 무대들을 통해 미국 소비자와 친해졌다고 정리합니다. 학술 분석 역시 유튜브와 한류를 활용한 프로모션이 미국 성공의 핵심 요인이었다고 지적합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모든 노출이 결국 만두 하나로 수렴한다는 것입니다. 농구장에서 이름을 보고, K팝 페스티벌에서 다시 마주치고, 유튜브 콘텐츠에서 한식을 접한 소비자가 마트 냉동고 앞에 섰을 때 손에 잡는 것은 언제나 같은 품목이었습니다. 인지도가 여러 제품으로 흩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의 노출이 한 번의 구매로 이어질 확률이 높았습니다.
하나에 집중한 결과가 숫자로 돌아왔다
결과는 매대 위에서 확인됩니다. 비비고는 미국 냉동만두 시장에서 선두 자리에 올랐고, B2C 기준 점유율은 41% 안팎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랫동안 이 시장을 지켜온 중국계 브랜드를 현지화 전략으로 넘어선 것입니다. 미국 시장 매출은 최근 1분기 기준 1조 1,800억 원, 약 8억 7,000만 달러 수준으로 보도됐습니다.
이 숫자는 만두라는 한 품목이 만들어 낸 결과만은 아닐 겁니다. 다만 그 품목이 문을 열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CJ가 미국을 해외 만두 매출의 70% 수준까지 끌어올리겠다고 밝힌 것도, 이 시장에서 만두가 여전히 전략의 중심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우리 브랜드는?
비비고의 미국 이야기를 우리 입장에서 다시 읽으면 세 가지가 남습니다.
첫째, 낯선 이름을 지키는 쪽이 유리할 때가 있습니다. 이해받기 쉬운 단어로 바꾸는 순간 기존 카테고리 안에서 비교당합니다. 다만 이름을 지키려면 그 이름값을 하는 실제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비비고에게는 얇은 피와 높은 채소 비중이 그 근거였습니다. 근거 없는 고집은 그냥 불편함으로 남습니다.
둘째, 미국에서 무거운 상품을 파는 일은 마케팅이 아니라 물류의 문제입니다. 브랜드가 아무리 좋아도 냉장 유통과 생산 거점이 없으면 규모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인수라는 큰 결정이 가능한 기업은 많지 않겠지만, 현지 파트너와 생산 기반을 어떻게 확보할지는 진출을 검토하는 단계에서부터 함께 놓여야 할 질문입니다.
셋째, 마케팅 예산을 한 품목에 몰아주는 편이 효율적입니다. 스포츠 스폰서십이든 인플루언서든, 노출이 여러 제품으로 흩어지면 어느 것도 기억되지 않습니다. 소비자가 매대 앞에서 떠올릴 단 하나를 정하고, 모든 노출이 그 하나로 모이게 만드는 편이 낫습니다.
비비고가 미국에서 한 일은 한식 전체를 알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두 하나를 제대로 파는 것이었습니다. 문은 좁게 열수록 확실하게 열립니다.
참고 자료
- The Korea Times: Bibigo features in Harvard Business School case study
- CJ Newsroom: Driving CJ’s Expansion into the US
- Asiae: CJ CheilJedang’s Bibigo savors success in overseas markets
- FKI Webzine: Bibigo’s Global Expansion Strategy
